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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무라 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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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무라 겐조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883년 도야마현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했다. 호치 신문사 기자, 후쿠미쓰 정 의원, 도야마현 의원을 거쳐 1928년 중의원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13선 의원을 지냈다. 그는 농림대신, 문부대신을 역임하며 농지 개혁에 기여했고, 중일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여 '중일 국교 정상화의 아버지'로 불린다. 1959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1969년 정계에서 은퇴하여 197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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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무라 겐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42년의 마쓰무라 겐조
원어 이름松村 謙三
로마자 표기Matsumura Kenzō
출생일1883년 1월 24일
출생지도야마현 후쿠미쓰 정
사망일1971년 8월 21일
학력와세다 대학교
경력
직위문부대신
임기 시작1955년 3월 18일
임기 종료1955년 11월 21일
수상하토야마 이치로
이전안도 마사즈미
이후기요세 이치로
직위농림대신
임기 시작1945년 10월 9일
임기 종료1946년 1월 13일
수상시데하라 기주로
이전센고쿠 고타로
이후소에지마 센파치
직위후생대신
임기 시작1945년 8월 17일
임기 종료1945년 10월 9일
수상히가시쿠니 나루히코 왕자
이전오카다 다다히코
이후아시다 히토시
소속 정당입헌민정당
익찬정치회
대일본정치회
일본진보당
무소속
신정클럽
개진당
일본민주당
자유민주당
칭호 및 훈장종2위
[[File:JPN Toka-sho BAR.svg|38px]]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의정 활동
직위중의원 의원
선거구도야마현 제2구
당선 횟수7회
임기 시작1952년 10월 2일
임기 종료1969년 12월 2일
선거구도야마현 제2구
당선 횟수6회
임기 시작1928년 2월 21일
임기 종료1945년 12월 18일

2. 생애

1928년 제1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입헌민정당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당선 직후 5·3 참변 조사단의 일원으로 중국을 방문했고, 황고둔 사건을 겪고 귀국했다. 이 사건을 하마구치 오사치 총재에게 보고했고, 하마구치는 이 문제가 일본의 국제적 신용과 관련된 중대한 문제임을 인식하고 직접 처리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마쓰무라는 이러한 하마구치의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1] 민정당은 나카노 세이고를 통해 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책임을 추궁했고, 결국 다나카 내각은 총사퇴했다.

1929년 하마구치 내각이 출범하면서 마쓰무라는 마치다 주지 농림대신의 비서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아다치 겐조 내무대신의 추천 덕분이었는데, 과거 마쓰무라가 기자 시절 아다치의 돗토리현 유세를 도운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마쓰무라는 마치다를 정치적 스승으로 삼고 그를 보좌했다.[1]

1932년 사이토 내각에서는 농림참여관을 맡아 고토 후미오 농림대신과 민정당 사이의 연락책 역할을 하며 농정 전문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했다.[1]

1936년 2·26 사건 이후 민정당 총무, 1938년 민정당 정조회장, 1939년 히라누마 내각의 농림정무차관을 역임했다. 1940년 민정당 해산 이후 1942년 총선에서 추천 후보로 당선되었고, 1944년 익찬정치회 총무·정조회장, 1945년 대일본정치회 간사장을 역임했다. 스즈키 간타로 내각과의 잦은 접촉을 통해 종전이 임박했음을 감지했다.[1] 전후 마쓰무라는 정당 해산을 막지 못하고 익찬회에 가입한 것에 대해 "혼자서라도 군부에 저항하지 못한 것은 자신의 생애에 오점을 남긴 것"이라며 후회했다.[1]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에서는 후생대신 겸 문부 대신을 맡았고, 시데하라 내각에서는 농림대신으로 자리를 옮겨 농지 개혁을 추진했다.[5] 당시 시급한 과제는 식량 위기 극복과 농지 개혁이었다.[5] 마쓰무라는 취임 직후 기자 회견에서 "농지 제도의 기본은 자작농을 많이 만드는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마쓰무라 내각은 농지 개혁 법안을 신속하게 국회에 제출했지만,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이 개혁안이 불충분하다고 판단하여 시행되지 못했다.[6] 결국 1946년 마쓰무라는 GHQ에 의해 공직 추방을 당했다.[6]

추방 기간 동안 표고버섯 재배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마쓰무라는 1951년 공직 추방 해제 이후 정계에 복귀하여 신정 클럽을 결성하고, 1952년 개진당 창당에 참여했다. 1954년 일본민주당 정조회장, 제2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의 문부대신을 역임했다. 1955년 보수합동으로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자 미키 다케오와 함께 파벌(미키·마쓰무라파)을 결성했다.

1959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 반주류파 통일 후보로 출마했으나 기시 노부스케에게 패배했다. 이후 중일 관계 개선에 주력하여 1959년1962년 두 차례 중국을 방문,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하고 랴오청즈-다카사키 다쓰노스케 협정(LT 무역 협정) 체결에 기여하는 등 양국 간 무역 재개의 발판을 마련했다.

1964년 이케다 하야토 총리 사임 후 후계 총재 선출 과정에서 고노 이치로를 지지했으나, 파벌 공동 대표였던 미키 다케오사토 에이사쿠를 지지하면서 파벌에서 이탈했다.

1969년 정계에서 은퇴했고, 1971년 8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883년 도야마현 후쿠미쓰정(현 난토시)에서 약종상을 운영하는 지주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2세 때 친모가 사망하고 계모 슬하에서 성장했다.

다테모토 초등학교 심상과·고등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도야마현립 제1 중학교에 진학했다. 이듬해 다카오카에 현립 제2 중학교(다카오카 중학교)가 개교하면서 2학년으로 전학갔다. 다카오카 중학교 제1기 졸업생이다. 재학 중 교장 배척 운동으로 2주간 정학 처분을 받기도 했다.[1] 졸업 성적은 12명 중 7등이었다.

1902년 도쿄전문학교(현 와세다 대학) 고등예과에 진학했다. 다카오카 중학교 교장이 "관립 학교에 가라"고 강권한 것에 대한 반항심으로, 동급생 2명과 함께 사립인 와세다 진학을 결심했다. 아버지는 마쓰무라가 약사가 되어 가업을 잇길 바랐지만, 끈질기게 설득하여 도쿄 유학을 허락받았다.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과 제2회 졸업생이다. 졸업 논문으로 「일본 농업 공황론」을 집필했다. 학생 시절부터 중국과 농업에 강한 관심을 가졌다. 마쓰무라 겐조가 평생 매달린 주제는 중일 관계와 농정이었다.

1906년 대학을 졸업하고 호치 신문사에 입사했다.[1]

2. 2. 기자 생활과 정계 입문

1906년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호치 신문사에 입사했다.[1] 미노우라 가쓰토 사장은 호치 신문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와세다 대학의 다카다 사나에에게 인재 추천을 의뢰했고, 다카다의 추천으로 마쓰무라가 입사하게 되었다. 기자 시절 오쿠마 시게노부의 간사이 여행을 동행 취재하면서 오쿠마와 인연을 맺었다.

1912년 부친 사망으로 가업인 약국을 물려받기 위해 귀향했다.[1] 1917년 후쿠미쓰정(현 난토시)의회 의원, 1919년 도야마현의회 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2. 3. 중의원 의원 활동과 농정 참여

1928년 제1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입헌민정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선 직후 5·3 참변 조사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방문했다. 이후 장쭤린이 암살당한 황고둔 사건이 발생하자 귀국했다. 일련의 사건을 총재 하마구치 오사치에게 보고하자 하마구치는 "이 문제는 실로 중대하다. 당파를 초월한 중대 사건이니 이 문제의 처리는 나에게 맡겨주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일본의 국제적 신용이 걸린 문제이니 직접 처리하겠다는 하마구치의 태도에 마쓰무라는 실로 훌륭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1] 민정당은 기자 출신 의원인 나카노 세이고에게 질문을 맡겼다. 나카노는 만주의 중대 사건이라며 완곡한 표현을 사용하며 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책임을 추궁했고 결국 다나카 기이치는 총리대신의 자리를 내놓았다.

1929년 7월 하마구치가 총리대신이 되었고 민정당 내각이 수립됐다. 내무대신이 된 아다치 겐조의 추천을 받아 마쓰무라는 농림대신으로 취임한 마치다 주지의 비서관이 되었다. 이는 과거 마쓰무라가 기자였을 때 아다치가 돗토리현에 유세를 한 적이 있었는데 마쓰무라가 동향인 현지사를 설득해 아다치 일행을 환대했던 것을 갚아준 것이었다. 마쓰무라는 감사해 하며 마치다를 정치적 스승으로 모셨다.[1]

이누카이 내각1932년 1월 중의원을 해산하자 총선이 시행됐는데 민정당에게 어려운 싸움이었다. 마쓰무라도 최하위 기록으로 아슬아슬하게 당선됐다. 총선 이후 사이토 내각이 출범하자 입헌정우회에서 다카하시 고레키요, 미쓰치 주조, 하토야마 이치로가, 민정당에서 야마모토 다쓰오나가이 류타로가 각각 입각했다. 마쓰무라는 농림참여관이 되었다. 당시 농림상은 귀족원 의원이던 고토 후미오였는데 마쓰무라는 고토와 민정당 사이의 연락책 역할을 맡았고 의회 대책에도 관여했다. 마쓰무라가 농정 전문가로 두각을 나타낸 것이 이 무렵이었다.[1]

1936년 2·26 사건이 발생한 뒤 민정당 총무가 되었다. 1938년엔 민정당 정조회장이 되었고 다음 해 히라누마 내각이 발족하자 농림정무차관에 취임했다. 1940년 민정당이 해산했으며 1942년 총선 때 추천 후보로 입후보해 당선됐다. 1944년 5월 익찬정치회 총무·정조회장이 되었고 1945년 4월엔 대일본정치회 간사장이 되었다. 스즈키 간타로 내각과 자주 접촉하면서 종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1] 전쟁이 끝난 뒤에 정당이 해산하는 것을 막지 못해 익찬회에 가입한 것을 반성했으며 "어쩔 수 없는 환경이었다고 하지만 혼자서라도 군부에 저항하여 소신을 관철하지 않은 것은 내 생애에 오점을 남긴 것이었다"라고 훗날 회고했다.[1]

2. 4. 전후 내각 참여와 공직 추방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에서 후생대신 겸 문부 대신을 맡았고, 시데하라 내각에서는 농림대신으로 자리를 옮겼다.[5] 농림대신으로서 가와이 요시나리를 사무차관으로, 와다 히로오를 농정국장으로 발탁하여 당시 시급한 과제였던 식량 위기 극복과 농지 개혁에 힘썼다.[5]

마쓰무라는 취임 직후 기자 회견에서 "농지 제도의 기본은 자작농을 많이 만드는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농림성은 제1차 농지 개혁법 원안을 마쓰무라 대신 취임 4일 후에 완성했고, 1개월 후 국회에 법안을 상정했다.[5] 그러나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이 개혁안의 내용이 불충분하다고 판단하여 결국 시행되지 못했다.[6]

1946년, 마쓰무라는 GHQ에 의해 공직 추방을 당했다.[6] 추방 기간 동안 표고버섯 재배와 중국 난 재배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소유하고 있던 산림을 조금씩 팔아서 생활비를 벌었다.

2. 5. 정계 복귀와 보수 정치 활동

1951년 8월, 마쓰무라 겐조는 공직 추방에서 해제되었다. 그는 곧바로 오아사 다다오 등 옛 민정당 출신 의원들과 함께 신정 클럽을 결성했다. 이들은 요시다 시게루의 자유당에 대항하기 위해 새로운 정치 세력을 모으고자 국민민주당과 합당 교섭을 시작했다.[7] 아시다 히토시, 미키 다케오 등과의 협상을 통해 1952년 2월 개진당을 창당했다. 개진당은 총재를 공석으로 두고, 마쓰무라를 중앙상임위원회 의장으로 선출했다.[7]

1954년, 마쓰무라는 일본민주당 창당과 함께 정조회장에 취임했고, 제2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에서 문부대신으로 입각했다. 개진당과 일본민주당 시절, 마쓰무라는 모미야마 히로시, 고야마 구니타로, 쓰루미 유스케, 나카무라 산노조, 가와사키 스에고로, 마쓰우라 슈타로 등 옛 민정당 좌파 정치인들을 결집하여 파벌을 만들었다. 1955년 보수합동으로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자, 마쓰무라는 옛 국민협동당 출신인 미키 다케오가 이끄는 파벌과 힘을 합쳐 '미키·마쓰무라파'로 불리는 파벌(정식 명칭: 정책연구회)을 결성했다.[1] 제3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 당시 미키는 마쓰무라를 중의원 의장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당시 의장이던 마스타니 슈지가 유임을 강력히 주장하여 마쓰무라는 의장직을 맡지 못했다.

1959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마쓰무라는 반주류파 통일 후보로 출마했다. 기시 노부스케가 320표를 얻어 1위를 차지했고, 마쓰무라는 166표를 얻는 데 그쳤지만, 예상보다는 많은 표를 얻었다. 기시 노부스케 집권 시기, 중국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이에 마쓰무라는 중국을 방문하여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을 가졌다. 1960년 기시가 물러나고 이케다 내각이 출범하자, 마쓰무라는 이케다 하야토와 긴밀히 연락하며 중일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1962년 9월, 마쓰무라는 두 번째로 중국을 방문하여 양국 간 본격적인 무역 재개의 발판을 마련했다.

2. 6. 중일 관계 개선 노력

1959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기시 노부스케 총리의 매파적인 자세와 미일 안보 조약 개정 움직임으로 중일 관계가 악화되자, 마쓰무라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다.[7] 이시바시 단잔의 방중과 연동하는 형태로, 1959년 10월에 중국을 방문하여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을 가졌다.

1960년 안보투쟁 이후 이케다 내각이 발족하자, 마쓰무라는 이케다 하야토 총리와 긴밀하게 연락하며 중일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1962년 9월, 마쓰무라는 두 번째로 중국을 방문하여 랴오청즈-다카사키 다쓰노스케 협정(LT 무역 협정) 체결에 기여했다.[9] 이 협정으로 중일 간 본격적인 무역 재개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1964년, 이케다 하야토의 총리 퇴진으로 후임 총재 선출 과정에서 마쓰무라는 중일 관계를 중시하는 고노 이치로를 지지했다. 그러나 미키는 사토 에이사쿠를 지지하여, 마쓰무라와 미키는 결별하게 되었다.

1970년 3월 21일, 마쓰무라는 우호 방문단을 이끌고 다시 중국을 방문하여,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전 외무대신을 저우언라이에게 소개했다.[9]

2. 7. 정계 은퇴와 사망

마쓰무라는 중일관계 정상화에 대한 집념을 불태웠지만, 이 무렵에는 이미 고령이었다. 결국 측근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1969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정계 은퇴는 장남이 아버지에게 직접 권유했다고 한다.[8]

1970년, 전 외무상 후지야마 아이이치로저우언라이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 우호방문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다.[9]

1971년 8월 21일, 향년 88세로 사망했다. 사인은 화농성 담관염과 담석증이었다.[9]

3. 평가

마쓰무라 겐조는 중일 관계 개선과 농지 개혁에 헌신한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1962년 두 번째 중국 방문을 통해 양국 간 무역 재개의 발판을 마련하여 '중일 국교 정상화의 아버지'로 불린다.[1] 1970년에는 저우언라이 총리로부터 중일 무역 지속을 허가받는 기업의 조건을 제시받았고, 대만에 많은 투자를 하고 지원하고 있는 기업과의 거래는 거부하겠다고 밝히며 중일 국교 정상화의 기반을 다졌다.[1]

마쓰무라는 시데하라 내각에서 농림대신으로 재직하며 제1차 농지 개혁을 추진했다. 당시 일본 사회의 시급한 과제는 식량 위기와 농지 개혁이었는데,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압력과 일본 의회의 노력으로 농지 개혁안이 통과되었다.[1] 비록 제1차 농지 개혁은 GHQ의 반대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지만, 마쓰무라는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 발전과 농업 생산성 향상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

4. 사상 및 정책

마쓰무라 겐조는 농본주의적 사상을 바탕으로 농업 진흥과 중일 관계 개선에 힘쓴 정치가였다.

대학 시절 「일본 농업 공황론」이라는 졸업 논문을 작성할 정도로 농업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1] 입헌민정당 소속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된 후 농림참여관, 농림정무차관 등을 역임하며 농정 전문가로 활동했다.[4] 5·3 참변 조사단의 일원으로 중국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중일 관계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4]

2·26 사건 이후 민정당 총무 및 정조회장을 역임했고, 대일본정치회 간사장을 지내기도 했다.[4]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는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의 후생대신 겸 문부대신, 시데하라 내각의 농림대신을 역임했다.[4] 1970년에는 우호방문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해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하기도 했다.

4. 1. 농업 정책

마쓰무라 겐조는 농업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진 농정 전문가였다. 그는 자작농 육성을 통한 농지 개혁을 주장했다.[4] 시데하라 내각에서 농림대신으로 재직하며 제1차 농지 개혁을 추진했지만,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이 개혁안이 미흡하다고 판단하여 결국 시행되지 못했다.[4]

4. 2. 중일 관계

1959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반주류파 통일 후보로 출마했으나, 기시 노부스케에게 패배했다. 기시 내각 당시 중일 관계가 악화되자, 마쓰무라는 직접 중국을 방문하여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을 가졌다. 1960년 기시가 물러나고 이케다 내각이 출범한 후에도, 마쓰무라는 이케다 하야토와 긴밀히 협력하며 중일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1962년 9월, 마쓰무라는 두 번째로 중국을 방문하여 양국 간 본격적인 무역 재개의 발판을 마련했다.

1964년 이케다가 건강 문제로 사임 의사를 밝히자, 마쓰무라는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고노 이치로를 후임 총재로 지지했다. 그러나 파벌 공동 대표였던 미키는 사토 에이사쿠를 지지했고, 결국 마쓰무라는 파벌을 이탈하여 독자적인 파벌을 결성했다.

이후에도 중일관계정상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고령으로 인해 1969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1970년 3월,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전 외무상과 저우언라이 총리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 우호방문단을 이끌고 다시 한번 중국을 방문했다.

마쓰무라는 총 5차례에 걸쳐 중국을 방문했으며, 1970년에는 저우언라이 총리로부터 중일 무역 지속을 위한 조건(대만에 대한 투자 및 지원을 많이 하는 기업과의 거래 거부)을 제시받았다. 이러한 노력은 중일 국교 정상화의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4. 3. 세계 평화 구상

그는 세계 헌법 제정을 위한 협약 소집에 서명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2][3] 그 결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 제헌 의회가 소집되어 지구 연방 헌법을 제정하고 채택했다.[4]

5. 기타

마쓰무라 겐조는 1883년 1월 24일 도야마현 후쿠미츠의 니시나미 지구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부유한 지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그의 친어머니는 그가 두 살 때 알 수 없는 이유로 가족을 떠났으며, 그는 의붓어머니 밑에서 이복 형제자매와 함께 자랐다.[1]

1969년, 장남 마쓰무라 마사나오가 정계 은퇴를 권유하여 이를 받아들였다.

도야마현 난토시에는 마쓰무라 기념회관이 있고,[10] 도쿄도 신주쿠구에는 와세다대학 역사관이 있다.[11]

5. 1. 가족 관계

마쓰무라 겐조는 1883년 1월 24일 도야마현 후쿠미츠의 니시나미 지구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부유한 지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친어머니는 그가 두 살 때 알 수 없는 이유로 가족을 떠났고, 그는 의붓어머니와 함께 이복 형제와 자매와 함께 자랐다.[1]

1969년에 장남 마쓰무라 마사나오가 정계 은퇴를 권유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5. 2. 기념 시설

6. 역대 선거 기록

연도선거 종류회차소속 정당득표수득표율(%)순위당선 여부선거구
1928년총선거16회입헌민정당2위당선도야마현 제2구
1930년총선거17회입헌민정당1위당선도야마현 제2구
1932년총선거18회입헌민정당3위당선도야마현 제2구
1936년총선거19회입헌민정당1위당선도야마현 제2구
1937년총선거20회입헌민정당2위당선도야마현 제2구
1942년총선거21회대정익찬회1위당선도야마현 제2구
1952년총선거25회개진당52,776표24.51위당선도야마현 제2구
1953년총선거26회개진당49,727표25.52위당선도야마현 제2구
1955년총선거27회일본민주당67,275표31.61위당선도야마현 제2구
1958년총선거28회자유민주당69,559표29.51위당선도야마현 제2구
1960년총선거29회자유민주당70,847표30.11위당선도야마현 제2구
1963년총선거30회자유민주당79,197표37.61위당선도야마현 제2구
1966년총선거31회자유민주당70,617표291위당선도야마현 제2구


참조

[1] 서적 Crisis and Compensation: Public Policy and Political Stability in Japa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 웹사이트 Letters from Thane Read asking Helen Keller to sign the World Constitution for world peace. 1961 https://www.afb.org/[...] American Foundation for the Blind 2023-07-01
[3] 웹사이트 Letter from World Constitution Coordinating Committee to Helen, enclosing current materials https://www.afb.org/[...] American Foundation for the Blind 2023-07-03
[4] 웹사이트 Preparing earth constitution {{!}} Global Strategies & Solutions {{!}} The Encyclopedia of World Problems http://encyclopedia.[...] 2023-07-15
[5] 웹사이트 コラム「農地改革の真相-忘れられた戦後経済復興の最大の功労者、和田博雄」 https://www.rieti.go[...] 2022-10-28
[6] 웹사이트 昭和20年(1945)12月|第1次農地改革:日本のあゆみ https://www.archives[...] 2024-11-15
[7] 서적 合併五十周年記念誌 福光町の歩み 福光町役場企画情報課
[8] 문서 三菱倉庫 사장
[9] 뉴스 松村氏ら広州入り 中国、手厚い歓迎 朝日新聞 1970-03-22
[10] 웹사이트 松村記念会館 https://matumurakenn[...]
[11] 뉴스 松村謙三氏の功績紹介 来年3月開館の早稲田大歴史館、関係者が福光来訪 http://webun.jp/item[...] 北日本新聞 2017-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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